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학살 (문단 편집) === 극단적 반공주의 ===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 때, 무자비한 학살이나 심지어 [[성폭행]]까지 저지른 공수부대원들을 두고 "같은 국민한테 어떻게 저렇게 잔인한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러나 그 같은 만행들은 광주민주화항쟁보다 30년 전에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나 [[제주 4.3 사건|제주양민학살사건]] 등을 보면 알겠지만 그 이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보도연맹학살이 벌어지던 1950년 6.25 전쟁 무렵,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수도 서울을 [[조선인민군|북한군]]에서 탈환하자, 피난을 갔다 돌아온 대통령 [[이승만]]은 기자회견장에서 "비록 부모 형제라고 할지라도 공산당이라면 용서 없이 처단해야 한다."라고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이승만은 원래부터 극단적인 반공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미국]]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모든 자유주의자와 자신에게 반대하는 좌익세력들은 추방되어야 하며,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 > - 미국 텍사스의 푸트만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마우리 메버릭(Maury Maverick)이 1949년 8월 록펠러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발췌 >"이승만은 파시스트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은 극단적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미국의 내부 안전부서(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에서 근무한 케네스 E. 맥더걸 대위가 1954년 10월 발간한 책에서 발췌 >"한국정부가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단순히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 > - 미군 소속 첩보 기관인 특무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1951년 4~5월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발췌 >"6.25 사변 당시 당지에서도 무고한 양민들이 54명이나 학살당한 사실이 새로이 드러났다. 지난 25일 그 당시의 생환자인 오모(당시 대한청년단 단장) 씨는 동 진상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당시 읍내 남선(南鮮) 곡산회사에 주둔한 육군 부대(대장 김삼환 상사)에서는 보련(보도연맹: 주) 관계자 및 회색분자라 하면서 양민들을 대량 검거하여 동 회사의 창고와 전 상은(商銀) 창고에 가두었다가 이들을 매일 몇 사람씩 트럭에 싣고 김해군 생림면 나박고개에서 총살시켰다 하며, 당시 생환자 7명은 거의가 현재 불구의 몸이 되었다 한다." >---- > - <국제신보> 1960년 5월 28일자 기사 >"부산 지검에서는 6.25 때 울산군에서 770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에 대하여 본격적인 수사를 전개했다. 이에 따라 27일 하오에는 그 당시 울산경찰서 운전수였던 김해진 씨와 이정희, 조광희 씨 등을 증인으로 환문하였다. >이들 증인과 3천 명에 달하는 유가족들에 의해 밝혀진 울산 양민학살사건은 다음과 같다. 6.25 때 서장이었던 조정호 씨, 사찰계장 조경래 씨, 형사반장 백인규 씨, 사찰형사 임병문 씨 등과 모 CIC 대원, 모 청년방위대원들은 83년(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경까지 7, 8회에 걸쳐 청량면 율반, 정곡 및 온양면 대설리 산골짝, 웅촌면 대복리 산골짝 등에서 옥리 박성용 씨 외 869명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당시 시체운반자인 이정희, 김해진 양씨와 목격자인 심작지, 차천덕 양씨 그리고 학살자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울주군 두동면 니전리 이청도 씨 등의 증언으로 사건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 <부산일보> 1960년 9월 28일자 기사 >"양산군 동면, 원동면, 물금면, 웅상면, 북면, 양산면, 하북면 7개 면에도 83년(1950년) 8월 24일 주민 700여 명이 공비토벌을 하기 위하여 주둔했던 육군 제23연대와 김종원이 지휘하는 부대와 현지 경찰 등에 의하여 빨갱이로 몰려 총살되었음이 밝혀졌다. 학살된 주민들은 북면 사배고개 뒤와 양산면 도산 뒷산계곡에서 총살된 것인데, 피살자는 주로 20대 청년들과 50세 미만의 남녀가 많았다 한다. 유가족들은 아직 유골을 가려내지 못하고 두 곳에 집단으로 묻어 놓고 있는데, 그 당시 억울한 사정을 알고도 독재정권 하에서는 입도 벌리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 >---- > - <부산일보> 1960년 5월 21일자 기사 >"부산제빙회사 앞 부둣가에 정박 중인 어선 선실 아래층에는 아비규환이자 생지옥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끌려왔는지 10여 명의 청장년들이 차마 보지 못할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휘두르는 몽둥이에 사람 살리라는 아우성소리와 개글거리는 비명소리가 귀청이 떨어질세라 울려왔다. 대검으로 귀를 잘린 청년, 팔이고 허벅지고 마구 칼에 찔리어 유혈이 낭자한 청년, 기진하여 까무러친 장년, 어떤 청년은 선실에 끌어내어 로프로 몸을 묶어 바다에 떠밀어놓고는 물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물위에 떠오르거나 헤엄을 치면 배 위에서 몽둥이로 패고 대나무로 물밑에 처넣고는 익사 직전에 끌어내는 등 전무후무한 고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몽둥이로 패고 칼로 찌르고 바다에 처넣고 이러한 고문의 반복으로 하루 밤 하루 낮을 선실 속에서 보내는 것이다. 밤낮으로 새로 붙들려오는 자는 인사불성의 참혹한 형체로 변하는 것이다. 지옥선인들 이렇게 처참할 수 있을 것이며 악랄할 수 있겠는가? 고문은 그 수단이 야만적이고 불법한 행위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그 목적은 고백을 얻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백을 얻고 죄상을 밝히기 위한 고문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잡힌 자는 무조건 빨갱이요 반송장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빨갱이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는 거짓말이라도 안댈 사람은 인간이라면 없을 것이다. >무거운 신음소리만이 선실에 자욱한데, 이윽고 젊은 여자의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옆방 기관실에서 들려왔다. 고문당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는 조용해졌다. 간간이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 부대원은 킬킬거리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저희들끼리 웃어댔다. 여자를 고문 끝에 갖은 난행을 한 것이다. 여자는 이튿날도 배에 붙들려 있었고, 사흘 만에 배가 거제도로 떠나는 갑판 위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밤바다를 달리는 배가 거제도 장승포에 닿은 것은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어두운 선창가에 끌려나온 일행은 다시 포승줄에 묶이고 트럭에 올랐다. 이때, 트럭 옆에서 어떤 군복이 내뱉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 배 안에서 적당히 처치할 것이지 뭐 때문에 여기까지 끌고 와. 가다가 산골짜기에서 쏴 죽여 버려!" 차는 부대 본부로 쓰이고 있는 객주집에서 멈추었다. 수십 명의 군복이 몰려나와 트럭에서 내리는 피의자들을 끌고 부대마당에 세우고 마구 몽둥이로 수없이 패고서는 감방에 몰아넣는 것이다. 감방이라고는 하지만 묵은 골방과 마굿간을 변조한 것으로 두루 아홉 자 정도의 방이었다. >여기에 무서운 고문으로 반죽음이 된 자들만 60여 명씩 두 감방에 수용되었으니 모두가 팔 하나 꼼짝할 수 없게 서서 밤을 새워야 할 판이니 이 숨막히는 고통이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대로 시간은 흘러 아침은 왔다. 아침 점호가 있고 난 후, 부대간부가 감방 문을 열었다. >이때 어떤 젊은이가 "수용자 중에서 생명이 위독한 자가 있으니 이 사람은 달리 편안한 곳에 수용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자 "넓은 방이 그립거든 이리 나와라. 그리고 위독한 놈도." 이날 이 두 사람은 아침도 못 먹고 총살되었다." >- <부산일보> 1960년 6월 3일자 기사 이렇듯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벌어진 잔혹함은 광주에서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세 차례의 정권 교체 그리고 30년이라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이러한 광경이 재현된 데에는 [[베트남 전쟁]]이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아이, 진짜 악랄했지. 경험이 있었으니까. 월남에 다녀온 사람들 아니오. 공수부대란 게 하사관들이 주축인데,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아 공수부대 내에서도 전투력이 월등했지. 그런 하사관들이, 군에 말뚝박기로 작심한 하사관들이 통제가 됐겠소? 팀(지대) 단위로 움직이는 공수부대에서 스물서너살 초급장교 말을 고분고분 들었겠느냐고. 팀원 절반은 하사관인데 그 중 한 둘이 월남전에 다녀온 산전수전 다 겪은 중사, 상산데…. 앞장서서 때려 잡으면 졸병들이 가만있었겠느냐, 말입니다. 육사 나온 대대장 이런 지휘관들은 ‘대검으로 찔러라.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머리통을 때려라’ 이런 말 안 합니다. 그냥 ‘데모하는 놈들은 끝까지 잡아라. 초장에 기를 완전히 꺾어라 그랬던 거지’” >---- > [[http://m.kwangju.co.kr/article.php?aid=1494774000604262006|익명의 특전사령부 제11공수여단 63대대 초급장교 증언]] >백척간두의 국가운명입니다. 월망 패망의 초기 현상인 국가 현실을 이대로 좌시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얼마 안 가서 패망의 도가니로 빠져듭니다. >---- > [[유학성]] 3군 사령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1974년~1979년까지 9차례 긴급조치가 발포되었으며, 특히 1975년 9월에 발포된 긴급조치 제9호는 1975년 5월에 발포되어 유신체제 붕괴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강압정책을 실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패망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5.17 내란]] 당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해체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다. 당시 국제정세를 이용하려 한 박정희 정부나 신군부의 인식 외에도 5.18 민주화항쟁 당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등에서 계엄군이 보여준 모습은 한국군 청룡부대의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s-5.1.4|퐁니-퐁넛 학살]]에 관한 증언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 지적되며, 5.18 민주화항쟁 당시 광주에 파병되었던 익명의 공수여단 초급장교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하사관들이 주축이 되어 극단적인 폭력성을 드러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항쟁 이후 [[미합중국 국방정보국]]은 광주를 한국의 "[[미라이 학살|미라이]]"라 지칭하며,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점령군 마냥 살상한 것은 신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베트남 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김정한(2020), "광주학살의 내재성 -쿠데타,베트남전쟁, 내전-", 『역사비평』 131.] "공산당이라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하라.", "빨갱이는 사람이 아닌 악마니까 모두 죽여야 한다."는 논리에 입각한 극단적 반공주의는 이승만 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 하에서 더욱 강력해졌고, 전두환의 쿠데타 과정에서는 마침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하는 것으로 그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에 투입되었던 계엄군 병사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들은 "빨갱이는 사람이 아닌 악마니까 모두 죽여야 한다."는 한국 정부가 정부수립 이래 세뇌시킨 극단적 반공주의를 그대로 실현했을 뿐이었으니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